맨위로가기

스에 오키후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에 오키후사는 1475년에 태어나 1539년에 사망한 무장으로, 스에 씨의 당주이자 오우치 가문의 중신이었다. 14세에 스에 씨의 당주가 되었으며, 1506년에는 스오 국 슈고다이 직에 올라 오우치 가문의 세력을 강화했다. 150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립하여 상경전에 참여했고, 1511년 후나오카 산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오우치 가문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오우치 요시타카의 후견인으로서 아키 다케다 씨를 공격했으나 모리 모토나리의 야습으로 패퇴하기도 했다. 1532년에는 규슈로 출진하여 오토모 씨와 싸웠으며, 1539년에 사망하여 차남 스에 하루카타가 가문을 계승했다. 그는 과묵한 성격과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와카와 렌카에도 능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수호대 - 슈고다이
    슈고다이는 무로마치 시대에 수호를 대신하여 임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한 인물로, 점차 세습화되어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으나, 국인과의 갈등, 내부 분열, 가신의 배신 등으로 흥망성쇠를 겪으며 전국 시대의 격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 수호대 - 나가오 하루카게
    나가오 하루카게는 센고쿠 시대 무장으로, 우에스기 사다자네의 양자이자 나가오 다메카게의 아들이며, 가스가 산성 성주를 지냈으나 동생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553년에 사망했다.
  • 스에씨 - 이쓰쿠시마 전투
    이쓰쿠시마 전투는 1555년 모리 모토나리가 스에 하루카타의 오우치 씨 군세를 이쓰쿠시마에서 기습하여 크게 승리한 전투로, 모리 씨가 주고쿠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는 발판이 되었으며 뛰어난 전략과 무라카미 수군의 협력이 주요 요인이었다.
  • 스에씨 - 스에 하루카타
    스에 하루카타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우치 씨의 중신이자 다이묘였으며, 오우치 요시타카의 총애를 받았으나 가문의 실권을 장악한 후 모리 모토나리와 대립하다가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 1539년 사망 - 김근사
    김근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기묘사화 이후 김안로의 측근으로 권력의 핵심이 되어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부정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몰락한 간신으로 평가받는다.
  • 1539년 사망 - 이사벨라 데스테
    이사벨라 데스테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자이자 만토바 후작 프란체스코 2세 곤차가의 부인이며, 정치적 역할과 문화적 후원을 통해 이탈리아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에 오키후사
기본 정보
씨명도 씨
이름도 흥방
시대전국 시대
출생문명 9년 (1477년) 이후
사망천문 8년 4월 18일 (1539년 5월 6일)
개명흥방, 도기·도린 (법호)
별명삼랑
계명대환원전투린도기대거사
묘소건소원 (야마구치현슈난시 도이)
용문사 (야마구치현 슈난시 나가호)
관위중무소보, 오와리 수
막부스오국슈고다이
섬긴 주인오우치 요시오키 → 요시타카
씨족도 씨
부모아버지: 도 히로모리, 어머니: 마스다 가네요시의 딸
형제다케모리(종경), 오키아키라, 흥방
배우자정실: 미기타 히로아키라의 딸
자녀오키마사, 다카노부
양자: 다카후사 (하루카타)

2. 생애

1532년, 오키후사는 오우치 요시타카의 명을 받아 2만 3천여 병력을 이끌고 규슈로 출진, 부젠에서 오토모 군과 싸우고 지쿠젠으로 들어가 오토모 씨의 성들을 공략하였다. 1534년, 세이바가하라 전투에서 오토모 군에 승리하였으나 이후 오토모 군의 원군이 도착하면서 패배하였다.

1539년, 오키후사는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가독은 차남 하루카타(다카후사)가 19세에 계승하였다.[9]

2. 1. 가독 상속

1475년 스에 히로모리(陶弘護)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1482년 아버지 히로모리가 암살당한 후, 스에 다케모리(陶武護)가 가독을 상속하였으나 스에 오키아키(陶興明)와의 대립으로 가문을 떠났다. 다케모리는 후에 귀참하여 오키아키를 살해했지만, 오우치 요시오키에게 추토되어 죽음을 맞이했고, 남은 오키후사가 14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했다.[9] 숙부인 미기타 히로아키가 후견했다.

2. 2. 오우치 요시오키 시대

1506년, 오키후사는 스오국 슈고다이직에 올라 오우치 가의 중신 필두로써 확고히 하였다.[4]

1508년,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옹립하여 일으킨 상경전에서 호소카와씨, 미요시씨와 대립하였다.

1511년, 후나오카 산 전투에서 선봉을 맡아 아마고 쓰네히사와 함께 오우치 군의 승리에 기여하였다.[5] 오우치 요시오키가 아시카가 요시타네를 쇼군에 옹립시키고 쇼군의 후견인인 간레이다이에 오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518년까지 오우치 요시오키는 실질적인 천하인이었다.)

1524년, 오우치 요시오키의 장남 요시타카의 후견인이 되어 아키 다케다 씨의 사토가나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다케다 씨를 구원한 모리 모토나리의 야습으로 패퇴하였다. 모리 모토나리의 기량을 높게 평가한 스에 오키후사의 주장으로 모리 모토나리를 오우치 가로 포섭하였다.

1528년, 오우치 요시오키의 임종으로 22세의 오우치 요시타카가 당주로 취임하였다. 당주 취임마다 내분에 휩싸이던 오우치 씨는 스에 오키후사의 영향력하에 순조롭게 가독 상속되었다.

2. 3. 오우치 요시타카 시대

1528년, 오우치 요시오키가 임종하면서 22세의 오우치 요시타카가 당주 자리에 올랐다. 오우치 가문은 당주가 바뀔 때마다 일족이나 가신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지곤 했지만, 요시타카 시대에는 스에 오키후사의 보좌와 덕망 덕분에 이러한 분쟁 없이 순조롭게 당주 교체가 이루어졌다.[9]

1531년에는 머리를 깎고, 1513년에 정했던 이름인[7] 도린(道麟)으로 불렸다.[8]

요시타카 시대 초기에는 북규슈 방면으로 세력을 넓히려 했다. 1530년 8월, 다테나와테 전투에서 북규슈를 담당하던 스기 오키유키가 쇼니 씨에게 크게 패하자, 1532년 11월, 오키후사는 대군을 이끌고 나가토 국에서 규슈로 건너가 오토모 요시아키, 쇼니 스케모토 등과 맞섰다. 오키후사가 이끄는 오우치 군에는 스기 오키유키, 니호 다카시게를 비롯해 아키즈키 씨, 기쿠치 씨, 규슈 지바 씨, 하라다 씨 등 북규슈의 주요 무장들이 합류했다. 그러나 쇼니 스케모토의 가신인 츠쿠시 코레카도가 가쓰오 성에서 굳세게 버티고, 오토모 요시아키가 지쿠젠 국을 침공하여 호시노 치카타다를 항복시키는 등 고전이 이어졌다.

1533년 2월, 요시타카는 오키후사의 사촌인 스에 타카야스를 원군으로 보냈다. 원군을 얻은 오키후사는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하여 히젠 국 미네 군 지쿠리 촌에서 쇼니 스케모토를 격파하고 추격했다. 나아가 오토모 측의 지쿠젠 칸코가쿠 성(현재의 후쿠오카 시 니시구)을 함락시키고, 오토모 측의 본거지인 분고 국까지 침공했다. 이러한 오키후사의 공세로 오우치 군의 우세가 확립되어, 1533년 12월에는 츠쿠시 코레카도가 항복했다.

1534년 4월 6일, 분고 세이바가하라 전투에서 오토모 측의 요시히로 우지나오, 칸다 치카마사 등을 격파하고 오토모 가문에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승세를 타고 7월에 히젠 미쓰야마(현재의 사가 현 간자키 군)에 주둔하여 류조지 이에카네의 사가 성을 공격하려다 류조지 군의 역습을 받아 패배했다. 그럼에도 오키후사의 우위는 변함없었고, 10월에는 쇼니 스케모토를 궁지에 몰아넣고 회유를 시도했다. 오키후사는 류조지 이에카네에게 사자를 보내 스케모토의 은퇴와 쇼니 후유히사에게 히가시히젠 전반의 영지 보장을 조건으로 중재를 의뢰했다. 오토모 요시아키와도 화해를 추진하여, 1535년에 오우치 가문 우위로 화의가 성립되자 오키후사는 야마구치로 돌아갔다.

1536년에는 요시타카의 명으로 다시 히젠을 침공하여 타쿠 성을 포위하고, 9월에 쇼니 스케모토를 자결하게 하여 쇼니 씨를 일시적으로 멸망시켰다.

1536년 6월 이전에 양자 다카후사(훗날의 스에 하루카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했다.

3. 평가

스에 오키후사는 과묵한 성격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와카(和歌)와 렌카(連歌)에도 정통했으며, 공경인 아스카이 마사토시(飛鳥井雅俊), 소세키(宗碩)와 교류했다. 오우치 가신단 중에서도 전공이 으뜸으로 꼽히는 명장이었지만, 와카에도 뛰어난 교양인이었다.

후나오카 산 전투에서는 "선봉에 서면 적의 병사를 모두 없애주겠다"라고 말한 아코니 나가히사에게, 오키후사가 "오우치 군은 야습에 약하다"라고 말하여 나가히사를 물러나게 했다고 한다.

규슈에서는 오토모 씨와 쇼니 씨에게 종종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쇼니 씨를 일시적으로 멸망시키는 무공을 세웠다. 또한 오토모 군과 싸운 세바가하라 전투는 오토모 군의 전략적 승리로 평가받지만, 이 전투에서 오키후사는 허위 정보를 흘려 오토모 군을 농락하여 일시적으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그 때문에 "전술적으로는 무승부"라고 평가받는다.[3]

죽기 직전, 다카후사(隆房)의 성격이 장래에 재앙을 불러올까 걱정했다고 한다.[3]

4. 일화

스에 오키후사는 과묵한 성격으로 문무를 겸비하고 와카(和歌)와 렌카(連歌)에도 정통했으며, 공경인 아스카이 마사토시(飛鳥井雅俊), 소세키(宗碩)와 교류했다. 오우치 가신단 중에서도 전공이 으뜸으로 꼽히는 명장이었지만, 와카에도 뛰어난 교양인이었다.

후나오카 산의 싸움에서 아코니 나가히사가 "선봉에 서면 적의 병사를 모두 없애주겠다"라고 말하자, 오키후사는 "오우치 군은 야습에 약하다"라고 말하며 나가히사를 물러나게 했다.

규슈에서는 오토모 씨와 쇼니 씨에게 종종 고전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쇼니 씨를 일시적으로 멸망시키는 무공을 세웠다. 세바가하라 전투는 오토모 군의 전략적 승리로 평가받지만, 이 전투에서 오키후사는 허위 정보를 흘려 오토모 군을 농락하여 일시적으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전술적으로는 무승부"라고 평가받는다.

장남 오키마사보다 쿄로쿠 2년(1529년)에 먼저 죽었지만, 오키마사와 요시타카의 관계가 험악했기 때문에 오키후사가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오키마사의 묘는 오키후사의 형 오키아키와 같은 야마구치현슈난시의 카이인지에 있다.

오키후사는 죽기 직전, 다카후사(隆房)의 성격이 장래에 재앙을 불러올까 걱정했다고 한다.

5. 스에 오키후사가 등장하는 작품

모리 모토나리(1997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나쓰야기 이사오)

참조

[1] 서적 大内氏實録 中元荘作 1885-10-28
[2] 서적 近世防長諸家系図綜覧 https://dl.ndl.go.jp[...] 1966
[3] 서적 山口県の歴史と文化 大学教育出版 2002
[4] 간행물 守護大名「大内家奉行衆」 山口県文書館
[5] 서적 萩藩閥閲録
[6] 서적 萩藩閥閲録
[7] 서적 陶興房壽像賛
[8] 서적 大内氏実録 マツノ書店
[9]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